낭만카페

혁은 아무리 중력의 영향을 덜 받는 물속이라지만, 다 큰 사내의 상반신이 수면 밖으로 다 나오도록 번쩍 안아든 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카메라 바디와 각종 렌즈, 거기에 조명 장비까지 얹으면 수십키로가 되는 짐을 악으로 깡으로 몇 시간씩 들고 다니다 보니 경력이 쌓여감에 따라 자연히 괴수가 된다는 전문 카메라맨. 그 괴물 같은 근력과...

“혁아… 으응― 혁아……!” 제대로 불이 붙었는지, 재촉하는 듯한 원영의 목소리에 혁은 등줄기가 쭈뼛 서는 기분을 느끼며 숨을 들이켰다. 그는 이제 당장의 장소가 야외건 뭐건 아무것도 따질 수 없었다. 그저 잠깐조차 떨어지는 게 아쉬워 상대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 서둘러 손을 놀려 수면 아래 저를 방해하고 있는 바지 버클을 풀어내기에 급급했을 뿐. 마침내 일...

미적지근한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걱정과 다르게 일은 순조로웠다. 다행이 날씨가 따라주었고, 사진은 혁이 장담했던 만큼 만족스럽게 나왔다. 다른 문제나 사고도 생기지 않아서 원영이 사장과의 담판을 통해 얻어낸 하루 연장일은 스태프들의 포상휴가로 쓰이게 됐을 정도였다. 변덕스런 날씨와 도움이 되지 않는 현지 기상청과 두루뭉술 대략적인 정보들까지. 불확실성이...

더운 기온에 땀이 베인 살갗 위로 혁의 손이 스칠 때마다 표면적인 열과는 전혀 다른 열기가 훅 하고 번졌다. 그건 원영이 거부할 수 없는 영역이었기에 그는 초조하게 말했다. “혁아… 윽, 우리 금방… 나, 나가야 해…” “괜찮아, 나도 보고 있어. 아직… 시간 있어.” 달콤한 꾀임 같은 소리에 당장이라도 넘어가고 싶었지만, 원영은 맘을 독하게 먹었다. 이대...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는 ‘금지품목’이라는 말에 가장 가까이서 듣고 있던 원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혁을 돌아봤다. “뭐야, 소품 중에 뭐 걸리는 거 있어?” “아닌데, 소품은 다 체크해서 가져온 거라 걸릴 게…… 아~…! 뭔지 알 것 같아. 장비는 아니고 내 개인물품인데, 섞여 들어갔나 봐. 갔다 올게~” “뭔데. 나도 같이 가. 혹시라도 뭐가...

외전 : 반지와 수영장

평일 오전 비수기임에도 인천 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혁과 원영은 새삼 인종의 다양성이란 것을 실감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국적으로 구성된 인파를 헤치며 출국장을 가로질렀다. 집합 시간에 늦은 건 아니었지만, 다른 스태프들은 이미 전부 도착한 상태라는 연락을 들은 참이라 걸음이 급했다. “아, 잠깐. 지갑… 지갑이 어딨지? 챙겼을 텐데.” 원영은 정신 없...

풋 하고 실소를 터뜨린 혁은 담배를 비벼 끄고는 원영을 당겨 안았다. 놀란 상대의 입에서 짧은 단말마가 새어나왔고, 담배는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혁은 발끝으로 남은 불씨를 잡은 뒤 품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하얀 귓가에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걸 말해주는 걸 깜빡했다.” “뭘?” “그 애가 매력적인 건 객관적인 사실이야. 매력이 있으니 인기 아이돌 자리도...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 두 사람이었지만, 원영은 왜인지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지난 며칠 간 바쁜 일정과는 별개로 유독 많은 일을 겪은 듯했다. 그만큼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가라앉길 반복하는 하루였다. 이유도 없이 이리저리 뒤척이던 그는 결국 이불을 박차고 거실로 나왔다. 베란다 문을 열자, 불어온 밤바람 덕분에 기분이 조금은 상쾌해지는...

“뭐… 왜 이래? 뭐!” 사뭇 진지해 보이는 혁의 표정에 심상찮음을 느낀 원영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발뒤꿈치가 문턱에 닿아서 그 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관계가 느슨해진 것 같아서 싫다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혁의 모습에 뜻 모를 위기감을 느낀 원영은 등에 닿는 차가운 문의 감촉을 의식하고는 손을 더듬어 문의 손...

한편, 스튜디오에선 일촉즉발이던 촬영 분위기에 짓눌려버린 스태프들이 쥐 죽은 듯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조금 굳은 표정을 한 혁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 작업 능률 따위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린 것 같은 현장 분위기를 마주한 그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몰아쉰 뒤, 애써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다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렇게 ...

어지간히도 화가 난 모양인지, 앞서 나간 사무실 문턱을 넘어 들어가기 무섭게 뒤따른 혁이 쾅 소리가 나도록 세차게 문을 닫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행동으로 보인 적은 거의 없던 사람이었기에 원영은 내심 놀랐지만, 굽히고 들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내색하지 않고 근처 벽에 삐딱하게 기대어 섰다. 혁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

후엔 공교롭게도 혁의 밤샘 촬영이 이어졌다. 그 날 이후 이틀을 꼬박 새우고 원영이 담당하는 OWLS 잡지의 촬영 건이 있는 당일에조차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따로 얘기는커녕 얼굴을 볼 틈도 없었다. 원영으로선 불만스러운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혁의 일정이 그렇게 꼬여버린 것엔 자신의 탓이 컸기에 불평을 말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혼자 속 앓이를 하던 나날이었...